왜구들의 고향을 찾아서. 지팡구가 어디야 도대체!

감춰진 우리역사를 찾아가는길은 정말 복잡하고 험난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서 -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주어진 지도들만 보고서는 도대체 우리역사가 한반도의 역사인지 중국의 역사인지 종잡을 방법이 없죠. 현대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 고문서 분석만으로는 역사왜곡의 가능성을 확신할 뿐, 이것이 '왜곡'된 부분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발달한 과학은, 우리의 역사가 어디서 펼쳐졌는지 가르쳐 줍니다.

한민족은 기록의 민족이죠. 그리고 1900년대 초반의 기술로는 일식이 있었다는것 까지는 예측이 가능하지만, 일식의 최적위치까지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서에 기록된 일식의 기록은 신뢰하는것으로 하고, 우리 역사의 실제위치를 찾아가 봅니다.

한국과학기술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쓴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라는 책에서 발췌한, 삼국시대 일식기록의 최적관측지 위치입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하대 신라만이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됩니다.
이것이 또 다른 재미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포스팅 맨 끝에 답을 가르쳐 드릴께요.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생들은 이 그래프를 그려내기 위해서 어떤 작업을 거쳐야 하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충분히 발달한 과학을 '마법'으로 생각하고 그냥 따라오시는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역사는 다 허공에 천갈래로 찢어서 날려버리시구요.

위 그래프에 나온대로, 고구려, 백제, 상대 신라는 대륙에 위치했습니다. 하대신라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게 되네요.

한민족의 역사는 대륙의 역사입니다.

역사왜곡에 앞장선 세력은 부정하고싶겠지만, 일식기록을 부정하겠다면 역사서 자체를 부정해야하고, 일식기록 최적위치 분석을 부정하고 싶다면 역사공부는 일단 접으시고 천문학 공부를 좀 오래 많이 길게 하셔야 반박을 해 볼까 말까 한 부분입니다. 박창범교수님은 서울대 천문학과 교수시절에 이 논문을 쓰셨습니다.

박교수님은 같은 책에서 일본의 위치를 특정했습니다.
필리핀에서 남중국 해상 근처에 일본이 있었겠군요. 배 띄워놓고 산 것이 아니라면 말이죠.

네. 왜구는 필리핀-남중국해 근처에서 살았군요.
왜구들이 섬에 살았다면 필리핀, 육지에 살았다면 지금의 베트남 - 광서성 - 광동성 - 혹은 대만섬에 있었어야 옳겠습니다.

그러면, 일본의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 우리역사와 일본의 역사가 가장 많은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임진왜란' 시기의 기록들 중에서 중요한 단서들을 찾아 가며 일본의 위치를 찾아 봅니다.

일본의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준비하는동안, 포르투갈출신의 제수이트들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1586년 5월 예수회의 일본 선교 총책임자인 코엘료는 오사카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알현해 대환영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규슈정복과 조선에 출병해 중국 대륙을 침공할 계획을 털어 놓았으며, 그 협력도 요청했다. 그리고 만약 조선과 중국 정복에 성공하면 중국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실제로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군함 2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무장한 포르투갈선의 채비를 의뢰했지만, 그것 보다도 규슈에는 예수회의 일본 선교의 본거지가 있으며, 거기에는 유력한 로마 가톨릭교도 영주도 있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는 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엘료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는 큐슈의 로마가톨릭교도 영주들과의 합동 작전을 하는 것은 어떤지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 선교를 우위에 서서 실시하기 위해 크리스천 영주들을 지원하려고 필리핀으로부터 함대를 파견받도록 1585년에 요청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코엘료 뿐만 아니라 당시에 많은 로마 가톨릭교회 예수회 선교사들이 공유하는 것이었다. 코엘료로서는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이라고 동조한 히데요시의 계획을 듣게 되어서 히데요시를 기쁘게 하면서 자신도 기뻐 신바람이 나서 그처럼 대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화가 되었다. 코엘료의 대답을 들은 히데요시는 큐슈의 크리스천 영주들의 군대는 코엘료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의 생각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 때문에 예수회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코엘료는 한척의 후스타선(Fusta 船)을 건조하고 대포를 몇개 구입했다. 그리고 코엘료는 자신이 그것을 타고 일본의 여기저기 각지를 돌아다녔다.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을 위해 하카타에 왔을 때 코엘료는 마치 대제독과 같은 모양으로 이 배를 타고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방문했다.
1587년 6월 규슈평정을 끝마친 히데요시는 하카타 근처에 개선해 와서 같은 달 10일에 코엘료의 배에 탑승해 하카타만 위에서 매우 사이 좋게 담소했다. 히데요시는 그 배에 탑승해서 선내를 상세하게 관찰하고 많이 칭찬하면서도 이것은 틀림없이 군함이다고 말했다. 히데요시가 본 코엘료의 포르투갈 군함은 매우 훌륭한 것이어서 히데요시는 막강한 군사력과 기리시탄 영주들을 거느린 예수회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히데요시는 곧바로 5개 항목에 걸치는 바테렌(反天連) 추방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추방령은 예수회가 자숙하고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배편이 없다는 문제도 있고 해서 실제로 이행되지는 않았다.
또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인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동인도 선교 총 책임자로 코엘료 신부를 일본 책임자로 임명한 사람)는 1591 년 3 월 3 일 (덴쇼 19 년 윤 1 월 8 일 ) 주라쿠 다이에서 히데요시를 만나 히데요시의 추방령을 무효화 시키도록 값비싼 선물을 히데요시에게 뇌물로 주고 추방령을 유야무야 시킨다.
; 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 : 일본 선교의 부흥과 쇠퇴의 요인 분석을 통한 적절한 일본 선교 전략의 모색》(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코엘료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난곳이 '오사카'입니다만, 지금의 오사카가 아닙니다. 코엘료는 지금의 일본열도에 간 적이 없습니다. 먼저 예수회의 동방선교기록과 당대 그림을 통해 코엘료가 필리핀 혹은 베트남 / 마카우에 머물렀음을 증명해 봅니다.

예수외 동방선교의 선발대는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입니다.
징그러운새끼 사람 잡아먹고 목아지만 둥둥 떠다니는걸 상상하나봅니다.
손에는 떡하니 사람 심장을 뽑아서 들고 있군요.

싸비에르의 항해경로 입니다. 몰로카제도로의 항해에 주목하세요.
그리고 광동성에 1549년 도착합니다만 연표에는 빠져있습니다. 치사하게 ㅋㅋ
싸비가 인도의 고아에 도착했다가 제일 먼저 말라카 해협으로 갑니다. 네. 해적들이 바글바글한 말라카해협에서 일본에서 죄짓고 쫓겨나 해적질하던 '안지로(바오로 디 산타후에), 안지로 여동생(요하네스), 안지로의 부하 (안토니오)에게 천주마교를 주입해서 1548년 3월에 세례를 줍니다. 1546년에 암몬에 갔다가 말라카로 돌아와서 거기서 개기면서? 혹은 해적선 타고 같이 다니면서 가르쳤군요.

싸비가 마카오에 성당짓고 나가사키에 가서 학교짓고 뭐 그런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역사의 빈틈을 파고듭시다. 저 제수이트 해적단이 진짜 한 짓을 찾아야죠.

1545년부터 1548년까지는 인도-말라카-몰루카-말라카-인도로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몰루카의 어디로 간걸까요? '암몬'에 갑니다. "Teluk Ambon"
인도네시아의 Maluku주, Teluk Ambon. 들어본 적도 없는 이름이다.
이 텔루크 암본섬에 많은게 '육두구' - Nutmeg입니다.
육두구
마젤란 미친새끼가 남들 다 지구가 둥글다고 할때 혼자서 지구는 둥글지 않고 럭비공처럼 생겼다고
우기고는 식량도 물도 쪼금 갖고 나가서 선원들 다 죽어가면서 도착한곳이 이동네.
함께 출발한 5척의 사람들 다 죽고서도 남은 한척이 싣고 돌아가서
본전뽑고 어마어마하게 남은 기적의 향신료.

보나마나죠. 이 육두구 장사가 얼마나 남는지 지금 이순간까지도 육두구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게임 '대항해시대'
지금 향신료가 대폭락이야 휴.... (저 향신료가 '육두구') ㅎㅎㅎ

그러면 싸비에르가 암본에 가서 3년동안 뭘 했을까요?
당연히 식민지 개척했죠. 누구랑 같이갔죠? 아까 말라카에서 만난 해적떼를 개종(이라고 쓰고 마인드컨트롤이라고 읽는다)시켜서 데리고 갔죠.

그래서 암본에 무슨짓을 해 놓았느냐. 당연히 단체 마인드컨트롤을 준비했습니다.

그냥 사람 살만한데는 성당으로 쫙 깔렸습니다. 여기는 무슬림의 나라 '인도네시아' 입니다.
사람 살만한데는 성당으로 쫙 깔렸습니다. 인도네시아의 무슬림이 많아서 이곳에선 무슬림과 천주마교 사이에 총격전도 벌어지고 살벌한 곳이 되었죠.

여기에 떡하니...
성 프란시스코 싸비에르 성당. 암본.

자기 이름 붙은 성당도 있어요.
싸비이름붙은 학교도 있고, 자기 동상도 있고 아주 휘황찬란 합니다.
거리거리 십자가가 널려있죠. 무슬림국가에.

이 암몬에 3년동안 다녀온게아니라 가는건 잠깐이고 3년동안 박혀있다 온거죠. 마인드컨트롤 안되면? 아까 데려간 해적들이 다 썰었을듯 하군요.

싸비에르 ; 믿던가 죽던가 골라라!

그리고 말라카로 돌아가서 인도의 고아에 가져다 내려놨겠죠. 그걸 포르투갈 해군은 다시 본국으로 수송. 제수이트는 선교팀이 아니라 식민지 개척팀입니다.

고아에서 이어지는 하비에르의 행적을 봅니다.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안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 사제, 수도사, 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 최남단 사쓰마 국과 오스미 국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하비에르 일행은 이곳에서 다카히사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중국인 봉사자(라고 쓰고 통역이라고 읽는다)가 따라간 이유는? 중국말때문이지 뭐 별거 있겠습니까?

포르투갈은 1543년경 일본(당시 무로막치 막부 시대)과 이어진 해로를 탐색하여 일본 남부의 큐슈와 교역을 개시했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중국제 비단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포르투갈 상인들은 일본의 큐슈까지 중국제 비단을 운송하기 위해 중국 해안에 위치한 확고한 근거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포르투갈이 마카오를 확보하게 된 건 1555년입니다.

이런 뻔뻔한 거짓말이 역사로 둔갑되어 있죠. 이게 거짓말인 이유를 알아봅니다.

첫번째 문제는 항속거리 입니다. 범선이라 연료문제가 아니라 '식수와 식량'을 보급할 보급기지가 말라카 - 큐슈 사이에 필요합니다. 그런데 광동에 1549년에 들렀다 갔다고 하는거죠. 저때는 광동 개항 전입니다. 1841년 영국의 홍콩점령 전까지는 마카오가 최전방 보급기지입니다.

두번째 문제는 마카오가 전진기지화 되기 전에 일본에 도착했기 때문에 마카오를 전진기지로 개발했다는 전후관계가 바뀐 설명입니다. 말라카에서 큐슈가 마카오보다 가깝다면 말이 되죠.

그래서, 맨 처음 박창범 교수가 제안한 '일본'의 위치가 이때 사비에르가 간 '큐슈'의 위치라고 보아야겠죠.

일본 최남단 '큐슈'의 사쓰마국과 오쓰미국에서 전도를 시작하고, 나중에 히라도 섬과 나가토국, 스오국을 거쳐 교토에 갔다고 합니다.

이걸 다시 박창범 교수의 일본위치와 비교해 봅니다.
바다위에 있을 수는 없으니, 육지와 면한곳, 베트남 남부 - 북부 - 광서성 - 광동성 - 복건성까지 일본의 위치로 지정이 가능하겠습니다만, 당시 복건성부터 광서성까지는 제국의 영토였으므로 제외.
베트남 해안이 가장 유력해집니다. 거기에 베트남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역사속의 나라가 있죠.

일식 분포로 본 일본의 '수도' 위치는 필연적으로 인도차이나반도 동쪽이 됩니다. 더 멀어지면 일식관측이 불가능해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현재의 '베트남'지역으로 특정지어집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여러 왕조가 있었습니다만, 북부 베트남과 라오스국경에는 높은 산들이 있어서 북부 베트남과 라오스는 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부 사이공 근처는 이야기가 다르죠. 삼각주로 이어진곳이라서 캄보디아와 남부 베트남은 연결이 가능합니다. '북부 베트남'과 '남부 베트남'의 오래된 불화가 설명이 가능할 듯 하군요. 이것은 1970년대의 베트남전쟁으로 다시 불거지게 됩니다.

1500년대엔 베트남 북부와 남부에 서로다른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북베트남엔 안남(安南)국, 그리고 남부에 있다가 1832년에 소멸된 국가의 이름은 참파(占波).
눈치빠르신분들은 바로 알아보실 수 있는 상징이 넘쳐흐르는 국기.
초승달과 '영국 동인도회사'의 빨간 가로줄무늬.
1500년대엔 아직 영국이 오질 않았으니 넘어갑니다. ㅎㅎ
국기에서 볼 수 있듯이, 무슬림계인 인도네시아 '참족(占族)'이 세운 나라입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싸비에르가 어디에 갔다가 왔는지 잘 알죠. 인도네시아 암몬섬에 가서 식민지 개척을 하고 왔습니다. '왜구 '안지로'와 함께, '중국인 도우미'를 데리고 도착합니다. 이걸로 '참파'지역엔 중국말이 통했다는걸 알 수 있네요. 지금도 베트남은 한자문화권입니다. 베트남어의 60%는 한자어죠. 프랑스놈들이 쳐들어와서 알파벳으로 글씨 쓰도록 강요하기 전까지는 베트남도 한자 썼습니다.

이 '참파'의 이름은 한자로 점파(占波), 수도는 임읍(任邑), 혹은 참파나가라(占波那加羅)라고 했습니다. 나가라 (Nagara)는 산스크리트어로 ( नगर ) - 도시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임읍(任邑) 역시 임나가라 (任那加羅)로 쓸 수 있겠네요..

임나가라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많은것들이 스쳐지나갑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기분나쁜 기록, '임나일본부'의 '임나가라'가 이곳과 연관된다는 느낌이 옵니다.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왜구의 임나가라 정복.
일제는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을 수정해 가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왜구들이 좋아하는 썰인 임나일본부썰 조금만 보겠습니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지역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설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의 임나(任那)는 임나가라(任那加羅) 혹은 임나국(任那國)이라고 불리던 고대 국가라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占波那加羅가 任那加羅라면? 왜구가 저곳으로 쳐들어와서 통치기구를 세워 다스렸다면 아주 자연스럽게 역사의 빈틈이 맞아들어갑니다. 한국인은 반도의 왜구통치를 인정할 수 없고, 왜구는 임나가라의 존재를 믿어의심치 않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죠.

싸비에르가 인도네시아의 암몬에 쳐들어갈 당시 이미 말라카해협의 왜구들을 끌고 간건 문서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왜구들이 인도차이나반도의 남부를 침공했다고 가정하면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광개토대왕비 해당문장을 읽어봅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속민 자유조공. 이왜이신유년래 도해 파백잔임나신라 이위신민.

지금까지 이 문장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내습하니 바다를 건너 백잔, □를 격파하여 신라를 [구원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일본 :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모두) 신민으로 삼았다

그러나, 두 해석 중 일본에 유리한쪽으로 해석해도 일본의 임나일본부 - 임나가라는 지금 인도차이나반도의 남쪽일 뿐입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에는 '백제'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백잔百殘'혹은 殘만이 등장하죠. 따라서 百殘任那加羅라고 해도 백제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저 백잔은 어디서 온 단어일지 찾아봅니다. 물론 왜가 쳐들어와서 부순곳은 베트남이므로 베트남의 역사에서 찾으면 되겠죠.

베트남족을 '월족'이라고 합니다. 백월(百越)은 장강 이남에서 베트남까지의 해안에 살고있던 월나라의 여러민족 중 백월족의 이름입니다. 백월족이 세운 나라가 베트남.

베트남의 역사상 대륙의 제국에게 지배받은 시기는? 오래된 시기는 빼고, 최근 1000년 정도만 보겠습니다. (최근 1000년이 중요한 이유는 아마 역사찾기 마지막 포스팅 정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게 되겠죠)

이조(李朝) 1009-1225년. 한국의 '화산 이씨'가 다스렸습니다.
800년 전 베트남 '리 왕조'서 한국 '화산 이씨' 나온 사연
진조(陳朝) 1225-1400년
호조(胡朝) 1400-1407년
그리고 1406-1407년의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
1418년 반란군이 일어나 1428년 대월(大越)을 세웁니다.
이후 지들끼리 싸우고 난리나는 뭐 그런 스토리.
그러면서 짬파도 있고 백월도 있고 그래서 인도차이나가 복잡하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백잔百殘은? 백월족의 잔당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백월의 잔당 임나가라. 베트남의 역사를 볼 때,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사건이 1406-1407에 일어났을 수 도 있고, 이조 이전인 1009년경에 벌어진 일일 수 도 있습니다.
제 생각엔 1406-1407경이 맞는것 같긴 합니다. 그래야 임진왜란과 멋지게 이어지거든요.
대월이 통일했다가 서로 내분이 일어났다가 중간에 '막부'가 들어서기도 하고 딱 임란 전후 일본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리하여 임나일본부설과 박창범교수의 천문분석, 그리고 프란치스코 싸비에르의 항해를 종합해서 고려할 때, 싸비에르가 간 '규슈'라는곳은 남중국해 해남도 근방. 통칭 '통킹만' 주변일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제수이트와 왜구의 관계로 돌아와, 임진왜란 직전의 일화를 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제수이트 추방령'인 바테른 추방령을 내리게 되는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요토미가 구주를 정복하고 나서 제수이트 가스페르 코엘료를 만납니다.

도요토미 ; 너네 뭔데 마인드콘트롤에 광분하고 자꾸 일본사람 노예로 잡아가냐?

코엘료 ; 아 그것이 이러저러해서 저러저러해서...
도요토미 ; 시끄럽고 짐싸서 다 나가라.

역사적으로는 코엘료가 임진왜란 직전, 도요토미를 만나서 도요토미가 일본을 친다고 하니 배도 주고 무기도 주고 제수이트 병력도 제공하고 거기에 기리시탄 성주들을 다 불러서 도와주겠다라고 제의했다 합니다. 심지어 '필리핀'에 있는 제수이트 함대(스페인함대)도 지원받겠다 라고 했죠.

그런데 그런 코엘료를 임진왜란전에 내치려고 한 것이 도요토미.
앞뒤가 맞질 않습니다. 무려 '뇌물을 바치고' 바테른 추방령을 무마했다는 기록이 있는걸 보면 확실히 바테른 추방령은 내려졌던 듯 합니다. 추방령을 뇌물로 무마한게 아닌거겠죠.
이후 임진왜란과 그 이후 도요토미가의 역사를 보면 도요토미는 코엘료에게 죽은듯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벌어지죠.
임진왜란이 반도에서 벌어졌다면 필리핀에 있던 함대들이 반도까지 올라오려면 중간 보급기지 없이는 전쟁을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임진왜란때까지 제수이트의 보급기지는 마카오가 끝. 만약 보급기지가 나가사키였다? 하비에르가 온 나가사키엔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김대건신부가 마카오까지 갈 이유 없이 하비에르가 있던 '나가사키'로 가서 거기서 신부가 되면 되는건데 '마카오'까지 가서 신부가 됩니다. 이것도 넌센스.

여하튼 기록상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직전, 제수이트 루이스 프로이스를 만납니다.

1583년(덴쇼 11년) 당시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선교의 제일선을 떠나 일본 예수회의 활동사를 기록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이후 프로이스는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일본 전국으로 견문을 넓혔다. 이 기록이 후에 『일본사』라고 불리게 된다. 1592년, 발리냐노과 함께 함께 마카오로 건너갔으나 1595년(분로쿠 4년)에 나가사키로 돌아와 1597년(게이쵸 2년)에는 『26성인의 순교 기록 』을 집필한 것을 마지막으로 7월 8일(5월 24일)(정유년(丁酉年)) 게이쵸의 역(정유재란)이 한창일 때 사망하였다

그가 쓴 일본사 입니다. HISTORIA DE JAPAM.

확실히 제수이트 기록으로 남은 일본의 이름은 'JAPAM' 입니다.
진짜 일본의 역사는 Champa 혹은 占波, 任邑, 任那加羅, 任那新羅 라는 이름으로 있었고, 제수이트는 그걸 애너그램으로 JAPAM을 만들었습니다.

이 JAPAM을 나중에 메이지 유신시절에 와서 다시 한번 흔들어 Japan을 만들어 낸것으로 보입니다. 역사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번을 흔들어놓는군요.

신라를 창조해내고, 조선을 만들고, 조선을 반도에 놓고, 임나일본부를 반도에 놓고, 광개토왕비를 고치고, 조선왕조실록을 만들고, 중국 고지명들을 고치고, 한반도 지명을 바꾸고, 그 수많은 함정을 헤쳐 나와야 JAPAM 과 JAMPA(CHAMPA)의 관계를 알 수 있게끔 뒤틀어 놓았습니다.

이 루이스 프로이스는 마카오와 나가사키를 왔다갔다 합니다.

나가사키가 잠파에 있었을 것이고, 제국이 왜구와의 무역을 중단했기 때문에, 제국과 왜 사이의 무역에 포르투갈이 끼어들어 마카오에 콜로니(Colony)를 깔았습니다.

나가사키에 들어온 포르투갈선을 그린 그림을 봅니다.
상단 그림의 좌하귀에 '코끼리'가 있습니다. 일본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습니다.

나가사키는 잠파에 있었습니다.

올바른 역사를 모르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임진왜란당시 명나라의 고려천자, 만력제는 섬라곡국(지금의 태국)에서 병력을 빌려 왜를 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차병섬라 계획)

태국에서 병력을 빌려 일본열도를 치러가는게 아니라 태국에서 베트남을 치러가기때문에 가능한 계획이었다고 봐야죠.

결국, JAPAM (왜국)의 위치는 CHAMPA(JAMPA)국이었습니다. 1823년에 멸망한게 아니라 지배층은 메이지 유신과 함께 반도와 열도로 이주해 온거죠.

지금까지 왜구들의 고향을 알아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1. 최고입니다. 다음 편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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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안방송에서 알게 되어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네요. 저는 베트남과 라오스를 오가며 참파왕국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오스의 국화가 참파꽃이죠. 현재 라오스는 불교국가이지만.....
    베트남 호치민에 살고 있는데 베트남 무슬림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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