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마교의 아시아 침공 ; 역사왜곡과 그 근거지 #2

지난 포스팅에서 알바본 바 와 같이, 1333년의 고려 충숙왕때 교황과의 서신교환이 진실이라면, 재미있는 상상이 가능해집니다.

고려 말 '천주마교'가 세를 너무 불리자 '주원장'이 반란을 일으켜 '명'을 건국한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주원장이 동시기 '반란'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오버랩되는건 왜일까요? 대륙과 반도에서 동시에 반란이 왜 일어날까요.

국명이야 어찌되었던, '북평'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있었던 한민족의 나라는 나라를 좀먹는 천주마교를 배척하고 새로운 체제로 변화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 남부 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던 주자학파의 성리학은 남송의 멸망 무렵에 조복(趙復, 1200∼1277), 요추(姚樞, 1204∼1280), 허형(許衡, 1209∼1281) 등에 의해 연경(燕京, 현재 베이징)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애초 천주마교가 실크로드를 따라왔다가, 이제는 배를 타고 들어와서 대륙 남부, 중부를 거쳐 북경까지 간거죠.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한반도에 천주마교가 소개된건 마태오리치가 쓴 '천주실의'가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좌 ; 마태오 리치. 확연하게 보이는 IHS - 제수이트의 표시
위키피디아 ; 마태오 리치 <--- 클릭

마테오리치(마테오리치 Matteo Ricci, 중국명 이마두 利瑪竇, 1552-1610)는 이탈리아출신의 예수회(會)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천주교를 선교한 인물입니다. 1571년 예수회에 가입하여 클레시오 로마노(로마대학)에서 스승인 클라비우스로부터 수학과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하였습니다. 1583년 조경(肇慶: 광동성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습니다. 이어 소주(韶州) ·남창(南昌)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고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습니다.

이자가 쓴 책이 한번쯤은 다 들어보셨을 '천주실의'죠.
그런데, 그 책에 들어있는 내용은 잘 모르실겁니다. 우리 교과서에는 천주실의가 '실학'의 기본이 되었다 뭐 이런식으로 쓱 넘어가니까요,.

천주실의를 보여드리려고 찾다보니 그 본질과 잘 맞는 곳에서 만든 그림이 있네요. 증산도 상생방송 제공

그런데, 천주실의의 내용은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이를 유지하시는 하느님'의 소개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교의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天主)임.
  • 유교의 기초적 교리를 인정.
  • 하늘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
  • 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통해 입증.
  • 하느님이 동물을 창조한 것은 인간이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임.
  • 죽은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음.
  • 성선설을 지지, 모든 행위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림.
  • 천주교 사제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 《천주교해략》을 읽을 것을 권함.
즉. '성경'을 대륙에 맞춰서 적절히 바꾼 마경을 만들어 놓은거죠. 위에서 보신 상생방송에서 왠지 사랑할 것 같군요. - 이후 동아시아 사이비 대란의 원흉이 마태오 리치입니다.
위키피디아의 천주실의 설명 <=== 클릭!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 이걸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받아들여 건국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고려는 알고보니 천주마교를 믿은 듯 합니다.

주원장이 도교와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걸 보면, 조선도 다를 이유가 없겠죠. 물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은 '스님이 됩니다. 당대의 석보상절이나 월인천강지곡같은 것들도 다 불교를 기반으로 한 작품이죠.

조선 첫 단추부터 '유교'가 역사에 사기친 흔적이 보입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4번째 왕입니다. 조선은 '유교'로 시작한 듯 하지 않군요.

그러면 '유교'라고 알려진 '주자학'이 언제 한반도에 도입되었나 살펴봅니다.

주자 ; 1113년~1200년까지 살던 인물입니다. '복건성' 출신. 복건성에 이 당시 사람살데는 바닷가 뿐이라는걸 아실겁니다. 나머진 다 산이거든요.

정성공이 멍청해서 바닷가만 점령한게 아니라, 바닷가 빼면 사람 살데가 못됩니다.
대만섬과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 복건성. 즉 주자 = 왜구일 가능성이 100%.
저지역은 지금도 해안가 외엔 사람이 살지 않는 산. 중앙정부의 통제가 잘 먹히지 않던곳이라
심지어 '해금령'을 내려서 아예 사람들은 전부 내륙으로 철수시키기도 합니다.
이 주자새끼의 후손이 한반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https://news.joins.com/article/1680027

1224년 주자의 후손이 고려로 망명했다고... 하는데, 복건성에서 고려로 망명하려면 육로로 오다간 북경정권에게 뒤지겠죠. 그래서 온 곳이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바닷길 최단거리로 왔네요.
왜구 입장에선 살던곳이 해안가, 중앙정부입장에서는 왜구 피해지역이 해안가.
그래서 반도의 토착왜구가 살던 지역으로 왔다고 봅니다.

여기서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를 보겠습니다.
제 8조.
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並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參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銜統合之怨,犯蹕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災變者,必有之矣。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公州江)바깥의 산형지세가 모두 본주(本主)를 배역(背逆)해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저 아랫녘의 군민이 조정에 참여해 왕후(王侯) · 국척(國戚)과 혼인을 맺고 정권을 잡으면 혹 나라를 어지럽히거나, 혹 통합의 원한을 품고 반역을 감행할 것이다. 또 일찍이 관노비나 진 · 역의 잡역에 속했던 자가 혹 세력가에 투신하여 요역(徭役)을 면하거나, 혹 왕후·궁원에 붙어서 간교한 말을 하며 권세를 잡고 정사를 문란하게 해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도 벼슬자리에 있어 용사하지 못하게 하라.

대강 저정도 지역부터는 산 때문에 사람사는곳이 황제가 사는곳을 등지게 됩니다. 
전라도와 차현이남이 같은 뜻이긴 하네요. 저쪽에서 몰려온것들이 전라도로 들어오니까요.

거기에 꼭 유교 어쩌고 하면 전라도에서 뭔가가 튀어나옵니다.
"성리학 도입, 과연 안향일까"…소장학자의 문제제기 전북대 전가람 박사, 앞선 시대 '김구(金坵)부자'역할 제시

전라도에 성리학 적장자가 와서 살고 있는데 무슨 안향이 뭐고 김구가 뭐고 무슨상관?

결국 한반도의 성리학은 대륙에서 몰살당할 위기에 몰려서 쫓겨난것들이 도망와서 나라를 들어 처먹은었고, 자기들의 만행을 감추기 위해 역사를 왜곡해 끼워 넣었다고 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왕조실록을 다 태워버리고 지들 맘에 맞는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어 냈겠죠. 대륙에 있던 왕실 몰래 반도에서 왕놀이 한것으로 봅니다. 조선왕조 실록 내내 신하들이 왕을 지들 마음대로 바꿨다 놓았다 죽였다 하는 이유가 그거겠죠?

천주마교것들이 대륙의 역사를 엉망 진창으로 만들어 놔서 지금은 마치 다른것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성리학이란 천주마교와 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알려진대로 조선 후기를 지배한 성리학 - 실학 테크트리를 보겠습니다.

일단 실학의 정의부터 ; 조선 후기 성리학을 보완하여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태도를 강조한 학문 이랍니다만...




저 천주실의를 보고 조선의 성리학이 발전하게 된다는데, 그 마귀 두목들이 ;

조선의 천주마교 교부라고 해야할까요?

성경을 비틀어 마개조한 마경을 공부해서 '성리마교'를 만들어 낸 사람들.
그러니 여왕이 안동에 와서 설치죠 ㅎㅎㅎㅎ

어쨌든, 조선중기 - 후기의 지배이념은 '성리학'이었습니다.

저들에 의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역사가 왜곡되고 하는거죠. 아직까지 여왕을 필두로 한 베네치안들은 동아시아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마태오 리치보다 조금 앞서서 동아시아에 도착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항로를 보겠습니다.

1542년에 인도의 '고아'에 도착, 그리고 1545-1548년에 말레이시아-필리핀에 도착했다가 바로 일본으로 가서 '인도와 일본을 오가며 선교'? 그리고 1552년에 중국에 도착을 해서 사망?

일본이 저 위치에 있던게 아니라, 왜구가 마카오쯤에 있어야 맞는 이야기 입니다. 일본까지 갈 수 있었는데 몇년 지나서 마카오에 도착하는게 전혀 개연성이 없습니다.

다음편에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와 일본의 관계, 마태오 리치와 성리학, 이들에 의해 벌어진 임진왜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