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궁궐을 찾아서. #2 "북궐"

북궐 (北闕) 이란 ; 
북궐(北闕)은 본래 왕이 머무는 곳, 나아가 중국의 황제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논어(論語)』「위정」편에 “북극성은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도 뭇별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공전한다[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하였는데, 이는 군왕의 덕치(德治)를 비유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북쪽의 방위는 왕의 거처와 동일시되었다. 왕은 항상 북쪽에 앉아 남면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신하의 입장에서 왕이 있는 곳은 언제나 북쪽이 된다. 따라서 왕의 거처가 비록 북쪽이 아니더라도 왕의 처소는 북궐로 통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면 세종대왕이 계셨던 북궐은 어디일지 찾아봅니다.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 1월 20일 계묘 1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학자라는것들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조선왕조실록'을 원본이미지로 볼 수 있게된 세상에 감사하게 됩니다. 만약 이 이미지를 보지 못했으면 감쪽같이 속을 수 밖에 없죠.
조선왕조실록이 가짜인 이유는 별거 없습니다.
  1. 한문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2. 왕조실록은 붓으로 받아쓴 초본이 있고, 그것을 정서하여 목판으로 만들어 찍어서 글자가 삐뚤빼뚤하게 찍힐 수 가 없습니다.
위 이미지에서 보다시피 일단 개발로 팠는지 괴발로 팠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정도면 일단 목판 판 애들에게 정성이라고는 1만큼도 찾아볼 수 없군요.

일단 조선왕조 실록이 위조인걸 확인 했습니다만, 내용을 좀 더 봅니다.

迹滯東藩, 班雖阻於漢殿; 心懸北闕, 祝冞切於華封。

자취가 동번(東藩)에 막혀 있으매, 반열(班列)은 비록 명나라 궁전(宮殿)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마는, 마음은 북궐(北闕)에 달려 있으매 축원은 화봉(華封)에 더욱 간절하나이다."이 문장은 '세종대왕'이 써서 바친걸로 되어있긴 한데, 저 쓰레기같은 퀄리티로 이 책이 진짜 역사서라고 하기도 쪽팔리거니와, 한전(殿)을 명나라 궁전(宮殿)으로 번역해놓은 꼴을 보니 역사왜곡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차라리 번역이 안되면 안된다고 쓰던가.

저들이 말하는 조선시대에 한(漢)나라가 존재했나봅니다. 아니면 한성(漢省)=명나라의 북경이던가요.

하여튼, 세종대왕은 자신을 '동번(東藩)"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고려사에 보면 '동번(東藩)'이 등장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34년(1080년) 12월 기사中

○ 동번이 난을 일으키자 중서시랑 평장사 문정을 판행영병마사로, 동지중추원사 최석(崔奭)과 병부상서 염한(廉漢)을 병마사로, 좌승선(左承宣) 이의(李顗)를 병마부사로 삼아서 보군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주(定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밤에 삼군이 각기 1만 명씩 거느리고 길을 갈라서 바로 적의 소굴로 향하였는데, 날이 샐 녘에 갑자기 당도하여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땅을 울리니 적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여 3백 92급을 베고 그 우두머리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소ㆍ말 백여 필을 노획하였고 적이 버린 군기(軍器)가 길을 메웠으며, 적의 막사와 부락을 파괴한 것이 십여 곳이었다. 해질 무렵에 개선하여 전승하였음을 아뢰니, 왕이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배위(裵偉)를 보내서 문정 등에게 내린 칙서에, “근래에 변방에 일이 그치지 않아 밤낮으로 걱정하였는데, 이제 아뢴 바를 살피건대 훌륭한 계책으로 오랑캐에게 항복을 받아 백성의 해를 소탕하여 짐에게 동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함은 오직 그대들의 공이다." 하고, 특히 문정에게는 무게가 백 냥 되는 은합 한 벌을, 최석ㆍ염한ㆍ이이에게는 무게 50냥 되는 은합 한 벌씩을 모두 정향(丁香)을 담아서 내려주었다.저 번(藩)이라는 어디서 많이 본 글자입니다. 청나라 역사와 일본역사에 모두 등장하는 글자.

대륙에서 쓰던 '번(藩)'의 의미를 봅니다.

고대 중국의 주(周) 왕조에서 왕실을 호위하는 역할을 맡은 제후들을 울타리라는 뜻의 번(藩)으로 부른 데에서 유래한다. 여기에서 파생되어 봉지(국國)를 받은 제후들을 널리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는 다시 나아가서는 제후들이 받은 영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으며, 번국(藩國, 또는 蕃國)이라고도 한다. 청(淸) 왕조에는 삼번의 난으로 유명한 삼번과 같은 번들이 존재했다.

다만 번왕이라 할 때에는 번국의 왕뿐만 아니라, 군왕도 아울러 일컫는다. 그리고 일본과 같이 고유명사로써 「○○번」이라고 사용되는 경우는 중국에 없었다. 예를 들어 당(唐) 말기에서 오대 십국 시대에 걸친 시기 지방에서 할거하던 절도사(節度使) 세력을 번진(藩鎭)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이들 번을 부를 때는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극용(李克用)」 등 지명 + 절도사(관직) 이름으로 불렀으며, 청 왕조의 삼번은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왕호를 사용했지 「○○번」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번을 부여받은 자는 지방의 일부 토지를 부여받고 토지 내의 징병, 징세, 관리 임용권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독립국가의 역할과 대등할 정도였다. 번의 존재를 당시의 황제 강희제는 꺼림칙하게 생각하였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번을 폐지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쓰는 번의 의미를 봅니다.

에도 시대의 유학자들이 중국으로부터 제도, 용어 등을 받아들이면서, 쇼군에게 영지를 안도받은 다이묘들을 제후로 보았을 때, 통치하고 있는 영지를 ‘번국’(藩国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번’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만석 이상의 소출을 내는 영토를 보유한 봉건영주인 다이묘가 지배한 영역과 그 지배기구를 가리킨다. 에도 시대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아니었으나 간혹 그 용례가 보이고, 메이지 시대에 비로소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은 번의 영주인 다이묘를 ‘번주’(藩主), 그 밑의 가신들을 ‘번사’(藩士)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일련의 명칭은 사실 당대의 표현이 아닌 현대의 역사용어이다. 번이 실제 존재했을 당시에는 ‘〇〇家中’과 같이 다이묘 집안의 명칭으로 번을 지칭했고, 봉지에 후(侯) 호칭을 붙이거나(예를 들어 센다이 번의 번주는 ‘仙台侯’) 본래 관직명을 부름으로써 번주를 호칭했다. 번사의 경우도 공식적으로는 어느 지역에 속한 ‘게라이’(家来)라고 불렀고, 간혹 ‘惣士’라고 부른 예도 있다.

일본은 신국(神國)의 신성한 영토라는 관념을 갖고 있어서 근대국가와 같은 강한 영토의식을 갖고 있었고, 막번체제를 갖고 있어 번 자체가 반쯤은 국가였다. 에도 시대에는 중국 한족 말로 번을 가리켜 전부 '국가'라고 썼고 도리어 '번'이라는 말을 쓴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최근의 일본사 연구자 중에는 번체제를 봉건제라고보다 오히려 초기 근대국가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면 막번체제는 일종의 연방국가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번은 미국의 주보다 독립성이 훨씬 더 강하다. 검문소(세키쇼)가 있고, 인근의 번 영지로 갈 때는 여권인 데가타가 있어야 했다.

여기까지 읽어보니, 역사가 어떻게 된건지 대강 감이 옵니다.


동북아 전체를 아우르는 나라가 있었고, 각 지역별로 절도사를 두어 다스리게 했으며, 그것을 '번(藩)' 이라 불렀고, 그 '번'들의 연합체가 국가였던 형태. 그리고 하나의 역사를 3국으로 찢어발겨 멋진 소설을 쓴거군요. 거기에, 양이들의 '성경에 맞춘 연대기놀이'덕분에 역사서를 여러가지 버전으로 찢어서 만들어낸것.

'번주'라는 벼슬은 없지만 '절도사'가 실제 번국의 왕.
그러니 이순신장군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농사지어 전쟁을 했겠죠.

그렇다면, 태조 이성계가 만든 '북궐'은 어디인지 자명하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이곳. 대원군이 온 나라 나무를 다 잘라다 복원한 곳. 경복궁 중건한것이 여기.
서궐도 있었습니다.
서궐도안 ; 보물1534호
서궐 내에 있는 멋진 건물. 이 모든게 서울에 다 있으면 말이 아니되옵니다.
그렇다면, 동궐, 북궐, 서궐이 있는데, 태조 이성계는 5궐을 짓습니다.

정궁인 경복궁, 동궁 (창덕궁, 창경궁), 남궁 (덕수궁), 서궁(경희궁)

남경엔 뭐가 있었을지, 장안엔 뭐가 있었을지 안봐도 비디오네요.

댓글

  1. 놀랍습니다 글의 퀄리티가.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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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북궐(경복궁)은 자금성 남궁은 남경에 있고 서궁은 시안(서안)에 있다면 동궁(동궐) 은 반도에 있었다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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